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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

교과서엔 없는 베트남 지도자들의 진짜 이야기

by 박스피군 2025.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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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을 만든 얼굴들, 호찌민부터 현재까지, 시대를 바꾼 지도자들

한 나라의 역사는 결국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특히 베트남처럼 식민지배, 이념 갈등, 그리고 세계 최강대국과의 전쟁까지 파란만장한 100년을 보낸 나라의 역사는 더욱 그렇죠.

오늘은 교과서 속 딱딱한 이름이 아닌, 각자의 시대에 베트남의 운명을 짊어지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핵심 인물들의 삶과 고뇌를 더욱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그들의 선택이 어떻게 오늘날의 베트남을 만들었는지,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펼쳐지는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보시죠.

1세대, 독립의 새벽을 연 선구자들

프랑스 식민지배의 어둠이 가장 짙었던 20세기 초, 두 명의 위대한 사상가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각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판보이쩌우 (Phan Bội Châu)

불꽃같은 혁명가
그는 외세의 힘을 빌려서라도 일단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베트남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 보내 근대 학문과 기술을 배우게 하는 동유운동(Đông Du, 동쪽으로 가다)을 이끌었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하려는 원대한 계획이었죠. 그의 삶은 중국과 태국을 넘나드는 망명 생활의 연속이었고, 불굴의 의지로 항불(抗佛) 운동을 이끌었으나 결국 프랑스에 체포되어 가택 연금 속에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혁명가였습니다.

판쭈찐 (Phan Chu Trinh)

냉철한 계몽가
반면 판쭈찐은 국민이 무지하면 독립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무장투쟁보다 민중 계몽이 우선이라 믿고,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식민 정부에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신교육 운동의 상징인 통킹 의숙을 세워 신학문을 보급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의 길은 당장의 성과보다는 먼 미래를 내다본 길고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방식은 달랐지만, 그들의 열정은 베트남 민족주의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을 거대한 나무로 키워낸 인물이 바로 역사에 등장합니다.

호찌민 (Hồ Chí Minh)

베트남의 국부, 영원한 '호 아저씨'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호찌민은 단순한 정치 지도자를 넘어, 베트남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자 국부(國父)입니다. 응우옌 아이 꾸옥(애국자 응우옌) 등 여러 이름으로 활동했던 그는, 30년간의 해외 생활 동안 파리, 모스크바, 광저우 등지를 넘나들며 서구 제국주의의 실상과 레닌의 공산주의 이론을 접했습니다. 그는 민족의 해방과 계급의 해방을 결합한 공산주의야말로 베트남을 구할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1930년, 그는 흩어져 있던 공산주의 그룹을 하나로 통합해 베트남 공산당을 창립합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혼란을 틈타 비엣민(베트남 독립동맹)을 결성, 탁월한 조직력과 대중 동원 능력으로 일본과 프랑스 모두에 맞서 싸웠습니다. 마침내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 그의 모습은 베트남 현대사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있습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조국의 독립과 통일에 헌신한 그의 소박하고 청렴한 삶은, 오늘날까지 베트남인들이 그를 친근한 '호 아저씨(Bác Hồ)'라 부르며 절대적인 존경을 보내는 이유입니다.

2세대, 전쟁과 통일의 영웅들

호찌민이 독립의 방향을 제시했다면, 그 길을 군사적으로 실현시킨 천재적인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보응우옌잡 (Võ Nguyên Giáp)

베트남의 전설적인 군사 전략가
원래 역사 교사였던 그는 정규 군사 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군사 역사에 길이 남을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막바지, 그는 요새화된 디엔비엔푸의 프랑스군을 격파하기 위해 수만 명의 인력을 동원해 맨손으로 정글을 뚫고 산 위로 대포를 끌어 올리는 상상 초월의 작전을 성공시킵니다. 이는 프랑스군에게 완벽한 기습이었고, 이 전투의 승리로 베트남은 프랑스를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는 세계 최강 미국에 맞서 끈질긴 게릴라전과 심리전(구정 대공세 등)을 통해 결국 조국을 통일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약소국이 강대국을 이긴 군사 혁명의 상징으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응오딘지엠 (Ngô Đình Diệm)

비운의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
분단 시기, 남베트남(월남)의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강력한 반공주의자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이 강했지만, 국민 대다수가 불교도인 나라에서 가톨릭 중심의 편파적인 정책을 펼치고, 동생 응오딘뉴를 앞세운 비밀경찰 통치와 부정부패로 민심을 잃었습니다. 특히 1963년, 정부의 불교 탄압에 항의하며 소신공양한 틱광둑 스님의 사건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등을 돌린 미국의 묵인 하에 발생한 군사 쿠데타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의 삶은 냉전 시대 분단 국가의 고뇌와 갈등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좌 : 보응우옌잡 / 우 : 응오딘지엠

3세대, 쇄신과 도약의 설계자들

통일의 기쁨도 잠시, 베트남은 전쟁의 상처와 무리한 사회주의 정책으로 극심한 경제난에 빠졌습니다. 이때, 베트남의 운명을 바꾼 개혁가가 등장합니다.

응우옌반린 (Nguyễn Văn Linh)

 '도이머이'의 아버지
1980년대 베트남은 초인플레이션과 식량 부족으로 파탄 직전에 몰렸습니다. 당내 보수파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당 서기장이었던 응우옌반린은 스스로를 개혁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너질 것이라며 과감한 결단을 내립니다. 바로 1986년에 채택된 개혁·개방 정책, '도이머이(Đổi Mới)입니다. 이는 사회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그는 베트남의 생존을 위해 시장경제 요소를 전격 도입했습니다. 그의 용기 있는 선택은 오늘날 베트남이 '아시아의 용'으로 도약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좌 : 응우옌 반린 / 우 : 응우옌푸쫑

4세대, 현대 베트남을 이끄는 얼굴들

도이머이 이후, 베트남은 안정 속의 성장을 추구하며 새로운 리더십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응우옌푸쫑 (Nguyễn Phú Trọng)

반부패의 상징, 대나무 외교의 확립자
2011년부터 2024년 7월 타계하기 전까지 3연임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운 당 서기장입니다. 그는 **'불타는 용광로(đốt lò)'**라 불리는 초강력 반부패 캠페인을 통해 "젖은 장작(고위직)이라도 용광로에 넣어야 한다"며 당과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웠습니다. 외교적으로는 강대국 사이에서 실리를 챙기는 '대나무 외교' 노선을 확립하며 현대 베트남의 정치·외교적 기틀을 다진 강력한 지도자로 평가받습니다.

또 럼 (Tô Lâm) & 르엉 끄엉 (Lương Cường)

 2024년의 새로운 리더십
응우옌푸쫑 서기장 타계 이후, 2024년 베트남은 새로운 리더십을 맞이했습니다. 공안(치안) 분야 전문가인 또 럼이 공산당 서기장에, 군 출신의 르엉 끄엉이 국가주석에 오르며 안정 속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등장은 베트남이 앞으로 반부패 드라이브와 정치적 안정을 얼마나 중시할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과거의 유산은 어떻게 현재를 만드는가?

이처럼 베트남의 현대사는 각 시대의 지도자들이 내린 결단과 투쟁의 총합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 인물들의 유산이 박물관에 갇히지 않고, 오늘날 베트남을 움직이는 살아있는 원리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호찌민의 사상은 국가의 최고 이념으로, 보응우옌잡의 불굴의 정신은 '대나무 외교'의 뿌리로, 응우옌반린의 개혁 정신은 현재 경제 정책의 기반으로, 응우옌푸쫑의 반부패 의지는 새로운 지도자들에게 계승되고 있습니다.

과거 지도자들의 유산을 바탕으로 안정과 성장의 균형을 맞추려는 베트남의 노력. 이들의 역사를 아는 것은 역동적인 나라 베트남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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