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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

83년간 바닷속에 잠든 136명, 장생탄광의 비극

by 박스피군 2025.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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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 두개의 콘크리트 기둥, 83년간 잠들어 있는 183명의 무덤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의 한적한 바닷가.

그곳에는 마치 버려진 등대처럼, 두 개의 낡은 콘크리트 기둥이 덩그러니 솟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피아(Pia)'라고 부릅니다. 과거 해저 탄광의 환기구이자 배수구였던 이 구조물은, 이제 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차가운 바닷속에 갇혀 돌아오지 못한 183명 영혼의 유일한 비석이 되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 136명의 피와 눈물이 잠들어 있는 장생탄광(長生炭鉱,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현장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잊혔던 그날의 비극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진실을 향한 외침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글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예고된 인재, 지옥으로 향하던 해저 터널

장생탄광은 육지에서 굴을 파 바다 밑 1km 이상까지 뻗어 나간 해저 탄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구조는 처음부터 '죽음의 덫'과도 같았습니다. 

법규를 무시한 위험천만한 설계 : 일본 법률상 해저 탄광은 바닷물의 압력을 견디기 위해 해저 표면에서 최소 40m 이상의 깊이에 만들어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장생탄광은 이 규정을 무시하고, 해저면과 불과 30m, 일부 구간은 고작 7m 두께의 얇은 지층 바로 아래에 갱도를 뚫었습니다.

이윤에 눈먼 불법 채굴 : 회사는 더 많은 석탄을 캐내기 위해 갱도를 지탱해야 할 버팀목(탄주)마저 불법으로 제거했습니다. 갱도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운 상태였죠.

외면당한 경고 신호 : 사고 전부터 갱도에는 바닷물이 새어 나오는 현상이 빈번했지만, 회사는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강행했습니다. 전시 체제하에서 석탄 증산이라는 목표 아래, 노동자들의 안전은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이처럼 위험천만한 해저 갱도는 일본인 노동자들조차 기피하는 작업장이었습니다. 그 빈자리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로 채워졌습니다. 그들은 고향과 가족을 등지고, 이역만리 바다 밑에서 하루하루를 공포와 싸우며 버텨야 했습니다.

 

1942년 2월 3일, 그날의 비명은 바다에 잠겼다

1942년 2월 3일 새벽 6시경, 결국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위태롭던 갱도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면서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맹렬한 기세로 갱도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갱도 안에서 필사적으로 석탄을 캐던 183명의 노동자들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에 휩싸였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차가운 바닷물은 삽시간에 허리, 가슴, 그리고 머리끝까지 차올랐습니다. 살려달라는 비명, 고향에 있는 가족을 부르는 절규가 뒤섞였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바닷물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사고 이후 회사의 대응이었습니다.

회사는 구조를 시도하기는커녕, 더 많은 바닷물이 유입되어 인근 다른 탄광에 피해를 줄 것을 우려해 갱도 입구를 두꺼운 널빤지로 막아버렸습니다. 혹시라도 살아있을지 모를 생존자들의 마지막 희망까지 차단해버린, 비인도적인 조치였습니다. 그렇게 오전 8~9시경, 갱도는 완전히 침수되었고, 조선인 136명과 일본인 47명, 총 183명의 노동자는 산 채로 바다 밑에 수장되었습니다.

83년간의 침묵, 그리고 끝나지 않은 진실 규명

참사 이후, 일본 정부와 기업은 이 비극을 철저히 은폐하고 외면하기에 이릅니다. 희생자 명단조차 제대로 공개하지도 않았고, 유해 수습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83명의 영혼은 8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잊힌 존재가 되어 차가운 바닷속에 잠들어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향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시민들의 기억 투쟁 : 1991년,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을 중심으로 장생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회(새기는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이들은 흩어져 있던 자료와 생존자 증언을 모으고, 매년 추도 집회를 열며 잊혀진 역사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을 되찾은 추도비 : 2013년, 이들의 노력으로 희생자 183명 전원의 이름이 새겨진 추도비가 사고 현장이 보이는 곳에 세워졌습니다. 비로소 희생자들은 이름 없는 원혼이 아닌, 이름 석 자를 가진 한 명의 인간으로 기억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해 발굴을 위한 간절한 시도 : 최근에는 크라우드펀딩 등으로 자금을 모아 잠수부를 동원한 유해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2024년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비록 더디고 힘들지만, 유해만이라도 고향 땅에 묻어달라는 유족들의 간절한 염원을 이루기 위한 위대한 첫걸음입니다.

우리가 이 비극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장생탄광 수몰사고는 단순한 안전사고가 아닙니다. 이는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 인력수탈 정책과 전쟁의 광기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철저히 짓밟혔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역사적 증거입니다.

이윤을 위해 안전을 무시하고, 국적을 이유로 위험한 곳으로 내몰고, 사고가 나자 구조조차 포기했던 비정한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한 줌의 뼛조각이라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시민들의 끈질긴 노력은, 과거의 비극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8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일본 정부와 관련 기업은 여전히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 그리고 유해 발굴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장생탄광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다 위 두 개의 콘크리트 기둥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픈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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