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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리포트

대통령 사망, 그러나 아무도 놀라지 않는 나라, 미얀마

by 박스피군 2025.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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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대통령 민 쉐

 

얼굴뿐인 대통령의 죽음, 그러나 미얀마의 봄은 오지 않았다.

2025년 8월 7일, 미얀마의 수도 네피도의 군 병원에서 한 명의 노인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이름은 민 쉐(Myint Swe), 74세. 공식 직함은 미얀마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다. 한 국가의 수장이 세상을 떠났지만, 수도 네피도의 권력 핵심부는 미동조차 없었고, 국정 운영 시계는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이전과 똑같이 흘러갔다.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죽었는데, 그 나라는 아무런 동요도 없을 수 있을까? 이 기이한 고요함은 민 쉐라는 인물이 미얀마 현대사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그리고 현재 미얀마의 권력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언이 아닌,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비극의 한 페이지가 조용히 넘어갔음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림자 대통령 민쉐의 죽음

그림자 대통령, 민 쉐는 누구였나?

민 쉐의 정치 인생은 처음부터 군부와 궤를 같이했다. 군 장성 출신으로 경력을 쌓은 그는 2016년,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 정부 시절 부통령으로 임명되며 정치 무대의 전면에 등장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역할'이 주어진 것은 2021년 2월 1일, 미얀마 군부가 총칼을 앞세워 민주 정부를 전복시킨 그날이었다.

군부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은 쿠데타 직후, 헌법에 명시된 절차를 따르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부통령이었던 민 쉐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내세웠다. 민 쉐는 군부의 꼭두각시로서, 쿠데타의 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구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군부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를 수차례 연장하며 독재의 기반을 닦는 동안, 모든 공식 승인 문서에는 민 쉐의 서명이 들어갔다. 그는 실권 없는 옥좌에 앉아 군부 통치의 합법성을 연기하는 '얼굴 마담'이자 '고무도장'이었던 셈이다.

 

텅 빈 옥좌, 권력의 진짜 주인

민 쉐가 명목상의 대통령으로 연기하는 동안, 미얀마의 실질적인 권력은 단 한 사람, 군부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의 손에 있었다. 그가 의장으로 있는 국가행정위원회(SAC)는 입법, 사법, 행정 모든 권력을 장악한, 헌법 위의 기구였다. 미얀마의 모든 정책 결정과 군사 작전, 외교 활동은 민 쉐가 아닌 민 아웅 흘라잉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민 쉐는 2024년부터 신경계 질환과 말초신경병증 등 심각한 건강 문제에 시달렸다. 제대로 된 식사조차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는 2024년 7월 자신의 모든 권한대행 업무를 민 아웅 흘라잉에게 공식적으로 위임했다. 사실상 이때부터 민 쉐는 정치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식물인간 상태에 가까웠다. 그의 죽음은 이미 1년 전에 비어버린 옥좌에서, 그의 이름표만 떼어낸 것에 불과했다.

권력의 진짜 주인은 누구

죽음의 타이밍, 군부의 계산된 행보

민 쉐의 사망 소식이 발표된 시점은 매우 흥미롭다. 군부가 2025년 7월 말, 2년 반 넘게 이어온 국가 비상사태를 해제하고, "6개월 이내에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공표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이는 군부가 자신들의 정치적 로드맵에 맞춰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시사한다.

군부가 민 쉐의 후임을 즉각 임명하지 않고 시간을 끄는 이유 역시 전략적 계산으로 풀이된다.

  1. 권력 공백의 부재: 이미 민 아웅 흘라잉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에, 새로운 인물을 서둘러 내세워 불필요한 혼란이나 권력 분점의 인상을 줄 필요가 없다.
  2. 총선 국면 장악: 총선을 앞두고 민 아웅 흘라잉이 군 최고사령관이자 실질적인 국가 수반으로서 전면에 나서는 것이, 군부 중심의 권력 구조를 공고히 하고 선거 국면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 더 유리하다.
  3. 정치적 부담 최소화: 명목상의 대통령을 새로 임명하는 복잡한 절차 없이,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실용적 판단이다.

결국 민 쉐의 죽음은 군부에게 있어, 총선을 통해 군부 독재를 합법적인 통치 체제로 전환하려는 '큰 그림' 속에서, 낡고 불필요한 장기 말을 치우는 과정에 불과했을 수 있다.

 

안개 속의 미얀마, 남겨진 숙제들

민 쉐는 떠났지만, 그가 얼굴 역할을 했던 군부 시스템은 더욱 견고하게 미얀마를 짓누르고 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미얀마의 진짜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 끝나지 않는 내전: 군부의 통치에 저항하는 시민방위군(PDF)과 소수민족 무장 단체들의 무장 투쟁은 미얀마 전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군부는 '안정'을 명분으로 잔혹한 진압을 이어가고 있으며,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다.
  • 국제사회의 불신: 군부가 주도하는 2025년 총선은 이미 '가짜 선거'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등 주요 야당은 강제 해산되었고, 모든 선거 과정은 군부의 통제 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다.
  • 무너진 경제와 민생: 쿠데타 이후 국제 사회의 제재와 내전으로 인해 미얀마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국민들은 극심한 빈곤과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민 쉐의 빈자리를 누가 채울 것인가는 더 이상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그의 자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미얀마 국민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안갯속에 갇힌 미얀마의 길고 긴 봄을 향한 투쟁은, 한 명목상 대통령의 죽음과 관계없이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내전 중인 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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