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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

미얀마의 근대 정치 역사

by 박스피군 2025.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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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100년,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좌절, 미얀마 근현대 정치사 이야기

 황금빛 탑들이 고요히 빛나고, 다양한 민족들이 각자의 문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나라 미얀마.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미얀마의 모습은 평화로운 풍경 뒤에 숨겨진 격동의 근현대사를 품고 있다.

 19세기 강력했던 왕조의 몰락과 쓰라린 식민지 경험, 독립 이후 민주주의를 향한 짧지만 뜨거웠던 열망,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길고 어두웠던 군부 독재와 민주화 운동, 잠시 찾아왔던 개혁의 희망과 또다시 닥쳐온 군부 재집권의 그림자까지, 미얀마의 지난 100여 년은 굴곡진 역사의 연속이었다. 

 이 파란만장했던 여정을 따라가며, 미얀마가 왜 오늘날과 같은 정치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그 뿌리 깊은 배경과 흐름을 함께 이해해보고자 글을 적어본다.

 

1. 왕국의 황혼과 식민지의 서막 (19세기 초 ~ 1885)

 19세기 초,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인 꼰바웅 왕조는 동남아시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였다. 미얀마 전역은 물론 인도 북동부 지역까지 영향력을 뻗쳤지만 서구 열강의 팽창은 미얀마에도 예외 없이 밀려오게 된다. 특히 영국과의 충돌은 왕조의 운명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어버리는데, 세 차례에 걸친 영국-버마 전쟁은 미얀마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 제1차 전쟁(1824~1826) : 이 전쟁의 패배로 미얀마는 아라칸(현재 라카인), 아삼 등 넓은 영토를 영국에 넘겨주어야 했다.
  • 제2차 전쟁(1852) : 왕위 계승 다툼으로 혼란했던 왕조의 약점을 파고든 영국은 미얀마 남부의 핵심 지역(이라와디 델타, 양곤 등)을 점령하였다.
  • 제3차 전쟁(1885) : 결국 영국은 북부 미얀마까지 침략해 수도 만달레이를 함락시키기에 이르고, 마지막 왕과 왕실 가족은 인도로 강제 추방당하게 된다.

 1886년, 미얀마 전역은 공식적으로 영국령 인도의 한 주로 편입되어버리고,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독립 왕국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미얀마 민중들의 격렬한 저항은 곳곳에서 이어졌지만, 영국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동인도 회사의 버마 침공 그림 및 동인도 회사 군대를 이끈 아치볼드 캠벨

 

2. 영 제국의 그림자 아래서 (1886 ~ 1948)

 영국의 식민 통치 하에서 미얀마 사회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영국은 관료제, 선거제도 등 근대적인 통치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식민 통치의 효율성을 위한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쌀, 티크 등 다양한 자원의 수탈이 이루어졌고, 영국 자본의 유입과 함께 인도, 중국 등에서 많은 이민자들이 노동자와 상인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얀마인(버마족)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반면 이민자들과 소수의 유럽인들이 미얀마의 상권을 장악하고 사회 상류층을 형성하면서 민족 간 갈등의 씨앗이 뿌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강력한 제국의 억압 속에서도 독립을 향한 민족의 열망은 피어나는데, 1920년대부터 학생들과 불교 승려들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싹트기 시작했고, '우리 버마인 협회(Dobama Asiyone)'와 같은 민족 운동 단체들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1930년대에는 아웅산(Aung San) 장군과 같은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들이 등장하며 독립운동을 이끌기도 하였다.

 특히 1938년의 대규모 반영(反英) 시위는 미얀마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혼란기는 미얀마 독립운동에 새로운 국면을 가져오게 되는데, 아웅산 장군은 처음에는 일본과 손잡고 영국에 맞서 싸웠으나, 이내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간파하고 항일(抗日) 운동으로 전환하여 연합군과 함께 싸우게 된다. 이러한 전쟁 과정을 통해 미얀마는 독립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내부적인 역량을 키워나갔다.

 

3. 독립의 기쁨과 불안한 첫걸음 (1948 ~ 1962)

 1948년 1월 4일,  마침내 미얀마는 '버마 연방(Union of Burma)'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으로부터 감격적인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은 안타깝게도 독립 직전에 암살당했지만, 그의 동지였던 우 누(U Nu)가 초대 총리가 되어 의회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독립의 기쁨도 잠시, 신생 독립국 미얀마 앞에는 험난한 길이 놓여 있었다. 독립 과정에서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소수민족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이다. 다수 민족인 버마족 중심의 국가 운영에 반발한 카렌족 등 여러 소수민족들이 분리 독립을 요구하며 무장 반란을 일으켰고, 공산당 세력의 저항까지 겹치면서 나라는 극심한 내전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집권당 내부의 분열과 경제난, 사회 혼란까지 더해지면서 민주주의 정부는 제대로 된 통치력을 발휘하기 어려웠고 점차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4. '버마식 사회주의'의 시대: 군부 독재의 서막 (1962 ~ 1988)

 불안정한 정국 속에서 결국 군부가 전면에 나서게 된다. 1962년, 네 윈(Ne Win) 장군이 이끄는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민간 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네 윈은 서구식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미얀마만의 독자적인 길을 가겠다며 '버마식 사회주의(Burmese Way to Socialism)'라는 이념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실체는 군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일당 독재 체제였다. 1974년에는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을 유일 합법 정당으로 규정한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었고, 모든 권력은 군부와 당에 집중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은행, 기업, 토지 등 대부분의 생산 수단을 국유화하고 외국과의 교류를 극도로 제한하는 폐쇄적인 계획 경제를 추진하였다. 불교적 가치와 민족주의를 강조했지만, 이는 군부 통치를 정당화하고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버마식 사회주의'의 결과는 참담하였다.

 비효율적인 국영 기업 운영과 폐쇄적인 경제 정책은 극심한 경제 침체를 가져왔으며, 국민들은 물자 부족과 인플레이션에 시달렸고, 암시장이 번성하는 등 사회 전반이 활력을 잃게 되었다.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는 철저히 억압되었고, 국제 사회로부터도 고립되기에 이른다.

 

5. 민주주의를 외치다: 8888 항쟁 (1988)

 오랜 시간 군부의 독재와 경제 파탄 속에서 쌓여온 미얀마 국민들의 불만은 마침내 1988년에 폭발하고야 만다. 특히 1987년, 네 윈 정권이 아무런 예고 없이 고액권 화폐 사용을 중지시킨 조치는 국민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저축을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고, 경제적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키게 되었다.

 1988년 8월 8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민주화 요구 시위는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승려, 공무원, 노동자, 일반 시민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군부 독재 타도와 민주주의 회복을 외쳤다. 이것이 바로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인 '8888 항쟁' 이다. 하지만 군부는 평화적인 시위를 무력으로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투옥되었다. 이 사건으로 네 윈은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그 바탕인 군부는 권력을 놓치지 않았다.

 

 

6. 철권 통치와 꺼지지 않은 희망 (1988 ~ 2010)

 8888 항쟁 이후, 새로운 군부 세력이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SLORC)라는 이름으로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 기구는 후에 국가평화발전평의회(SPDC)로 이름을 바꾼다) 이들은 민주화 요구를 억누르면서도 민심을 달래기 위해 1990년 총선을 실시하였다.

 이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전체 의석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미얀마 국민들은 마침내 민주주의의 새벽이 오리라 기대하였지만 군부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정권 이양을 거부하고야 만다. 오히려 아웅산 수치를 가택 연금하고 NLD 당원들을 탄압하며 군정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후 20여 년간 미얀마는 다시 깊은 암흑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군부는 철권 통치를 이어갔고, 민주화 운동은 끊임없이 탄압받았다. 국제 사회는 미얀마 군부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며 경제 제재를 가했지만, 군부는 끄떡하지 않고 미얀마는 점차 고립되어갔다. 소수민족과의 분쟁도 끊임없이 지속되며 나라의 불안정은 심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미얀마 국민들의 열망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7. 닫힌 문이 열리다? 제한적 개혁기 (2010 ~ 2021)

 2000년대 후반, 국제 사회의 압박과 내부적인 변화 요구 속에서 미얀마 군부는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군부는 2008년,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헌법적으로 보장(예: 의회 의석 25% 자동 할당, 국방·내무·국경 등 주요 부처 장관 임명권)하는 내용을 담은 신헌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킨 후, 제한적인 개혁 개방 노선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2010년에는 군부 주도의 관제 야당인 통합단결발전당(USDP)이 승리한 총선이 치러졌고, 이듬해 형식적으로나마 군복을 벗은 테인 세인(Thein Sein) 대통령의 준(準)민간 정부가 출범하였다.

 이 시기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오랫동안 가택 연금 상태였던 아웅산 수치 여사의 석방(2010년)이었다. 이후 언론 검열 완화, 일부 정치범 석방, 외국인 투자 유치 등 개혁 조치들이 이어지면서 미얀마에 대한 국제 사회의 시선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015년, 마침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로 평가받는 총선이 치러졌고, NLD는 다시 한번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비록 헌법 규정(외국 국적 자녀 보유) 때문에 아웅산 수치 여사가 직접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지만, '국가고문(State Counsellor)'이라는 특별한 직책을 통해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로서 미얀마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미얀마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봄이 찾아오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헌법에 명시된 군부의 막강한 권한은 여전히 민주 정부의 발목을 잡는 근본적인 한계로 남아 있었기에 미얀마의 짧은 민주주의는 막을 내리게 된다.

 

 

8. 다시 겨울로: 2021년 쿠데타와 현재

 민주주의를 향한 미얀마의 첫 걸음은 또다시 군부에 의해 가로막히게 되었다. 2020년 총선에서 NLD가 이전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두자, 군부는 또다시 '선거 부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2021년 2월 1일 새벽,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을 비롯한 윈 민 대통령 등 정부 지도자들은 다시 구금되었고, 미얀마는 10년 만에 다시 군부 통치 시대로 회귀하기에 이른다.

 군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이 이끄는 국가행정평의회(SAC)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 권력을 장악해버리고야 만다. 이에 맞서 미얀마 국민들은 전국적으로 시위를 벌이며 저항하였지만, 군부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이를 진압해 버린다.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현재까지 민주 진영(NUG, PDF 등) 및 소수민족 무장단체들과 군부 간의 치열한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국가와 민간의 경제는 파탄 나고 인도적 위기는 심화되는 등 극심한 혼란과 고통을 겪게 되었다.

 

 

끝나지 않은 여정, 미래는?

 미얀마의 1800년대 이후 정치사는 마치 끝나지 않는 굴레처럼,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군부의 개입, 그리고 소수민족 문제라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반복되는 과정이었다. 식민 지배의 상처 위에서 어렵게 싹틔운 민주주의는 번번이 군부의 힘 앞에서 좌절되었고, 국민들의 염원은 깊은 상처로 남게 되었다.

 2021년 쿠데타는 미얀마의 민주주의 시계를 다시 과거로 되돌려 놓았지만, 자유와 정의를 향한 미얀마 국민들의 투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들의 길고 험난한 여정이 어떤 미래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격동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미얀마가 처한 현실과 그들의 간절한 외침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미얀마 국민들의 끝나지 않은 여정에 많은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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