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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

미얀마의 주요 인물 (1900년 대 이후)

by 박스피군 2025.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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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역사를 움직인 얼굴들

 미얀마의 근현대사는 격동의 연속이었다. 왕조의 몰락과 식민 지배, 독립을 향한 투쟁, 짧았던 민주주의의 봄, 그리고 길고 어두웠던 군부 통치와 꺼지지 않는 민주화의 열망까지. 이 파란만장한 역사의 갈피마다 시대를 이끌고 때로는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들이 있었다.

 1900년대 이후 미얀마의 독립 영웅부터 현재 미얀마를 이끌고 있는 인물까지, 격동의 미얀마 현대사를 관통하며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주요 인물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통해 미얀마의 과거와 현재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미얀마 독립의 아버지, 아웅 산 (Aung San, 1915~1947)

 미얀마인들에게 '보족(Bogyoke, 장군)'이라는 존칭으로 불리며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인물, 바로 아웅 산이다. 그는 영국 식민지 시절, 미얀마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불멸의 영웅으로, 랑군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이끌며 정치에 발을 들였고, 민족주의 단체인 '타킨 협회'에 가입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 세계가 전쟁이 휩싸인 이 격동의 시기는 그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처음에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영국에 맞설 독립군(버마독립의용군, BIA)을 창설하고 일본이 세운 임시정부에서 잠시 활동하기도 했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간파한 뒤에는 연합군과 손을 잡고 항일 투쟁을 전개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영국과의 끈질긴 협상 끝에 마침내 조국의 독립을 약속받는 '아웅 산-애틀리 협정'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한다. 1947년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세력이 압승하며 독립 미얀마의 초대 지도자가 되는 것이 확실시되었는데, 안타깝게도 독립을 불과 6개월 앞둔 1947년 7월 19일, 각료회의 도중 정적들의 총탄에 맞아 여러 동지들과 함께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이하고야 만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32세에 불과했다.

 비록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희생과 헌신은 미얀마 독립의 초석이 되었다. 미얀마 국민들은 매년 7월 19일을 '순국열사(마티어스) 기념일'로 기리며 그의 넋을 기리고 있으며, 양곤의 '보족 아웅 산 시장'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 그의 이름과 흔적이 남아있다. 그의 딸이 바로 현재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 아웅산 수치라 불리는 인물이다.

2. 민주주의 시대의 첫 총리, 우 누 (U Nu, 1907~1995)

 아웅 산 장군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독립 미얀마의 첫걸음을 이끈 인물은 그의 동지였던 우 누라 불리는 인물이다. 1948년 독립과 함께 초대 총리로 선출된 그는 1962년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기 전까지, 짧은 중단 기간을 제외하고 미얀마의 민주주의 정부를 이끌었다.

 그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재건하고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노력하였다. 토지 개혁, 교육 및 보건 시스템 확대 등 다양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으며, 특히 불교를 국가 운영의 중심으로 삼아 1961년에는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기도 하였다. 외교적으로는 어느 한 진영에 치우치지 않는 비동맹 중립 노선을 추구하며 국제 사회에서 미얀마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자 했다. 그는 제1차 비동맹회의 창립 멤버로서 미얀마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그가 이끌던 민주 정부는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해야 했는데, 독립 직후부터 터져 나온 소수민족의 무장 반란과 공산당의 저항, 집권당 내부의 분열, 그리고 심각한 경제난은 정부의 통치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62년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고, 그는 총리에서 물러나 오랜 기간 가택연금과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비록 그의 민주주의 실험은 미완으로 끝났지만, 우 누는 미얀마 독립과 초기 민주주의 시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3. 군부 독재와 '버마식 사회주의'의 설계자, 네 윈 (Ne Win, 1911~2002)

 미얀마 현대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을 꼽으라면 네 윈 장군을 빼놓을 수 없다. 독립군 출신으로 군 요직을 거친 그는 1962년 쿠데타를 통해 성공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무려 26년간이나 미얀마를 철권 통치로 다스린다.

 그는 '버마식 사회주의'라는 독특한 이념을 내세웠는데, 이는 군부가 국가 운영의 중심이 되어 경제를 통제하고,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차단하며, 불교와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유일 합법 정당인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을 중심으로 한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1974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여 군부 중심의 국가 시스템을 공고히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주요 산업과 기업을 모두 국유화하고 폐쇄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미얀마를 깊은 수렁으로 빠뜨리게 되었다. 비효율적인 경제 운영은 극심한 경제 침체와 빈곤을 가져왔고,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는 철저히 억압되었으며, 정치적 반대 세력은 가혹하게 탄압받았다. 심지어 그는 점성술이나 수비학에 심취해 비합리적인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등 기행을 일삼기도 하여, 결국 쌓여왔던 국민들의 불만이 1988년 8월 8일, 대규모 민주화 시위인 '8888 항쟁'으로 폭발했고, 그는 시위의 압력 속에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네 윈은 미얀마 장기 군부 독재와 그로 인한 암울했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4. 신군부 시대의 강력한 지도자, 탄 슈웨 (Than Shwe, 1933~ )

 1988년 민주화 항쟁 이후 등장한 새로운 군부 정권(SLORC, 이후 SPDC로 개칭)을 약 20년간 이끈 인물이 바로 탄 슈웨 대장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1992년부터 2011년까지 군정 최고지도자로서 미얀마를 통치했는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미얀마는 여전히 강력한 군부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그는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고 아웅산 수치 등 민주 인사들을 탄압했으며, 국제 사회의 비판과 제재 속에서 고립을 자초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주도하였다. 국가 이름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변경하고, 수도를 양곤에서 네피도로 이전했으며, 2008년에는 군부의 권력을 헌법적으로 보장하는 신헌법을 제정하여 이후 제한적인 민주화 이행의 틀을 마련했다. 일부 경제 현대화와 인프라 개발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그의 통치는 기본적으로 군부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011년, 그는 공식적으로 은퇴하여 테인 세인 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이후 공개적인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있지만, 여전히 군부 내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왕'과 같은 존재로 알려져 있다.

 

. 민주화의 상징, 그러나 복합적인 평가, 아웅산 수치 (Aung San Suu Kyi, 1945~ )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자 세계적인 인권 아이콘, 아웅산 수치 여사는 '국부' 아웅 산 장군의 딸이라는 배경과 함께 일찍부터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영국 옥스퍼드 유학 후 미얀마로 돌아와 1988년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국민민주연맹(NLD)을 창당하여 이끌게 되었다. 1990년 총선에서 NLD가 압승했지만 군부는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녀는 이후 약 15년이라는 긴 세월을 가택연금 상태에서 보내야 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비폭력 민주화 투쟁을 이어간 공로로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10년 마침내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그녀는 2015년 총선에서 NLD를 다시 한번 압도적인 승리로 이끌었고, 헌법상의 제약으로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지만 '국가고문'이라는 직책으로 실질적인 정부 수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녀의 집권 이후 미얀마는 일부 개혁 조치를 단행하고 국제 사회에 복귀하는 등 긍정적인 변화를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지도력에 대한 평가는 복합적인데, 특히 로힝야 소수민족 문제에 대한 소극적인 대처는 국제 사회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으며, 이 문제는 그녀의 인권 아이콘 이미지에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2021년, 또다시 발생한 군부 쿠데타로 그녀는 다시 구금되었고, 여러 혐의로 장기형을 선고받아 현재까지 수감 상태에 있다. 여전히 많은 미얀마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의 희망으로 여겨지지만, 그녀의 정치적 여정은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고 있다.

 

 

6. 현재 미얀마를 이끄는 군부 지도자, 민 아웅 흘라잉 (Min Aung Hlaing, 1956~ )

 2021년 2월 쿠데타를 주도하고 현재 미얀마를 통치하고 있는 인물은 군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이다. 국방사관학교 출신으로 군 내부에서 착실히 경력을 쌓아온 그는 2011년 탄 슈웨의 뒤를 이어 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그는 군부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꾸준히 강화해왔으며, 로힝야 사태 당시 군 작전을 직접 지휘하기도 하였다.

 

 2021년 쿠데타 이후 그는 국가행정평의회(SAC) 의장으로서 실권을 장악했으며, 이후 스스로 총리직을 겸하고 2024년부터는 대통령 직무까지 대행하며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었다. 그의 통치 하에서 미얀마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내전이 격화되었으며, 심각한 인권 침해와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 이른다. 그는 국내의 거센 저항과 국제 사회의 강력한 비판 및 제재에도 불구하고 군부 통치 체제를 유지하려 하고 있으나 그것은 강력한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

미얀마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인 인물들

 아웅 산, 우 누, 네 윈, 탄 슈웨, 아웅산 수치, 민 아웅 흘라잉... 이들의 이름은 미얀마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하며 때로는 희망을, 때로는 좌절을 안겨주었다. 독립을 향한 열정,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 권력을 향한 야망, 그리고 그 속에서 고통받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이 인물들의 삶과 선택은 미얀마라는 나라가 걸어온 복잡하고 험난한 길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셈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미얀마의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의 어려움을 공감하며, 앞으로 미얀마와 우리나라가 나아갈 길에 대해 함께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미얀마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며, 이 땅의 미래를 만들어갈 또 다른 인물들의 등장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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