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에서 우리는 평화로운 출근길을 한순간에 지옥으로 만든 '2025 예루살렘 총격 테러' 사건에 대해서 다루어보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댓글로 분노와 안타까움을 표해주셨죠. 그리고 동시에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대체 왜? 그들은 왜 이렇게까지 싸우는 걸까?"
맞습니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얽히고설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뿌리를 찾아 긴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시면, 뉴스에 나오는 단편적인 총격 소식 너머의 거대한 역사적 비극을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예루살렘의 총성은 100년 전부터 울리고 있었다: 이-팔 분쟁 완벽 정리
모든 비극의 시작: 한 땅을 약속받은 두 민족
이야기는 100여 년 전, 지금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그 땅에는 아랍인들이 대다수를 이루며 살고 있었죠.
그런데 19세기 후반, 유럽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오니즘'이라는 민족주의 운동이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우리의 고향,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가 나라를 세우자!"는 꿈이었죠. 이 꿈을 따라 1882년부터 소수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터집니다. 당시 이 지역을 점령한 영국이 1917년, '밸푸어 선언'을 발표한 것입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을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 이 선언은 유대인들에게는 희망의 불씨였지만, 그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에게는 재앙의 서막이었습니다. 유대인 이민이 급증하면서 땅과 자원을 둘러싼 두 민족의 갈등은 점점 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 한 민족의 '독립', 다른 민족의 '대재앙'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은 이 뜨거운 감자를 유엔(UN)으로 넘겨버립니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로 나누고, 성지 예루살렘은 국제 공동 관리하에 두자는 '분할안'을 내놓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안을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우리 땅을 왜 남의 손으로 나누느냐!" 결국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선포하자마자, 주변 아랍 국가들이 연합해 이스라엘을 침공하며 제1차 중동 전쟁이 발발합니다.
전쟁 결과는 이스라엘의 승리. 이 과정에서 약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살던 집과 땅을 버리고 쫓겨나 난민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이날을 '독립기념일'로 기리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알 나크바(Al Nakba)', 즉 '대재앙의 날'로 부르며 피눈물을 흘립니다. 한날한시, 한 땅에서 벌어진 극명한 운명의 교차점이었습니다.
끝나지 않는 싸움의 이유: 평화를 가로막는 3개의 거대한 가시
그 후로도 수차례의 전쟁이 있었고,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더 많은 땅을 차지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양측이 총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3가지 핵심 쟁점 때문입니다.
가시 #1: 빼앗긴 땅, 그리고 세워지는 정착촌 (영토 문제)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그리고 동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바로 이 땅에 자신들의 독립 국가를 세우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 계속해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국제법상 불법이지만, 이스라엘은 "안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죠.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내 집 안방에 허락도 없이 다른 사람이 들어와 집을 짓고 있는 셈이니, 갈등이 멈출 수가 없는 겁니다.
가시 #2: 신의 도시를 향한 독점욕 (예루살렘 문제)
예루살렘은 단순히 한 도시가 아닙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더없이 신성한 '성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체를 "나눌 수 없는 영원한 수도"라고 선언했지만, 팔레스타인 역시 동예루살렘을 미래 국가의 수도로 삼고 싶어 합니다. 신의 이름 아래 평화가 깃들어야 할 이 도시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치열한 갈등의 화약고가 되어버렸습니다.
가시 #3: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 (난민 문제)
1948년 '나크바' 때 쫓겨난 75만 명의 난민들. 그 후손들은 현재 수백만 명으로 불어나 주변국 난민촌 등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이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 즉 '귀환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합니다.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돌아오면 유대인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이유 때문이죠. 할아버지가 살던 집 열쇠를 손에 쥔 채,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눈물은 분쟁의 가장 아픈 단면입니다.
전쟁과 협상, 피로 얼룩진 역사 연대표
- 1917년: 밸푸어 선언 (갈등의 씨앗)
- 1948년: 이스라엘 독립 & 1차 중동 전쟁 (나크바 발생)
- 1967년: 6일 전쟁 (이스라엘, 서안-가자-동예루살렘 점령)
- 1987년: 1차 인티파다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
- 1993년: 오슬로 협정 (평화에 대한 잠시의 희망)
- 2000년: 2차 인티파다 (희망이 절망으로)
- 2006년 이후: 하마스의 가자지구 장악, 반복되는 무력 충돌
이 글의 핵심 요약 (이것만 기억하세요!)
- 시작: 100여 년 전, 영국이 한 땅(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밸푸어 선언)하면서 갈등 시작.
- 분기점: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며 전쟁 발발. 이스라엘은 '승리', 팔레스타인은 '대재앙(나크바)'을 겪음.
- 핵심 쟁점 3가지: ① 점령지 영토와 불법 정착촌 문제, ② 누구의 수도인가를 둔 예루살렘 문제, ③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난민 문제.
- 결론: 이 분쟁은 단순히 '누가 옳고 그르다'로 판단할 수 없는, 두 민족의 생존권과 역사, 종교가 복잡하게 얽힌 비극이다.
예루살렘에서 울려 퍼진 한 발의 총성. 그 뒤에는 이처럼 100년 넘게 쌓여온 눈물과 분노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테러를 정당화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왜 이토록 지독한 증오의 사슬을 끊어내야만 하는지를 깨닫게 해줄 뿐입니다.
이 복잡하고 아픈 역사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과연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올 첫걸음은 무엇일까요?
지난 이야기
이스라엘 여행 가도 될까? 테러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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