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데일리 리포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진짜 이유는 100년 전?

by 박스피군 2025. 9. 9.
반응형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의 핵심 3가지

 

지난번 포스팅에서 우리는 평화로운 출근길을 한순간에 지옥으로 만든 '2025 예루살렘 총격 테러' 사건에 대해서 다루어보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댓글로 분노와 안타까움을 표해주셨죠. 그리고 동시에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대체 왜? 그들은 왜 이렇게까지 싸우는 걸까?"

맞습니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얽히고설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뿌리를 찾아 긴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시면, 뉴스에 나오는 단편적인 총격 소식 너머의 거대한 역사적 비극을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예루살렘의 총성은 100년 전부터 울리고 있었다: 이-팔 분쟁 완벽 정리

모든 비극의 시작: 한 땅을 약속받은 두 민족

이야기는 100여 년 전, 지금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그 땅에는 아랍인들이 대다수를 이루며 살고 있었죠.

그런데 19세기 후반, 유럽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오니즘'이라는 민족주의 운동이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우리의 고향,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가 나라를 세우자!"는 꿈이었죠. 이 꿈을 따라 1882년부터 소수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터집니다. 당시 이 지역을 점령한 영국이 1917년, '밸푸어 선언'을 발표한 것입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을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 이 선언은 유대인들에게는 희망의 불씨였지만, 그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에게는 재앙의 서막이었습니다. 유대인 이민이 급증하면서 땅과 자원을 둘러싼 두 민족의 갈등은 점점 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중동 지역 고지도

1948년: 한 민족의 '독립', 다른 민족의 '대재앙'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은 이 뜨거운 감자를 유엔(UN)으로 넘겨버립니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로 나누고, 성지 예루살렘은 국제 공동 관리하에 두자는 '분할안'을 내놓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안을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우리 땅을 왜 남의 손으로 나누느냐!" 결국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선포하자마자, 주변 아랍 국가들이 연합해 이스라엘을 침공하며 제1차 중동 전쟁이 발발합니다.

전쟁 결과는 이스라엘의 승리. 이 과정에서 약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살던 집과 땅을 버리고 쫓겨나 난민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이날을 '독립기념일'로 기리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알 나크바(Al Nakba)', 즉 '대재앙의 날'로 부르며 피눈물을 흘립니다. 한날한시, 한 땅에서 벌어진 극명한 운명의 교차점이었습니다.

 

 

 

끝나지 않는 싸움의 이유: 평화를 가로막는 3개의 거대한 가시

그 후로도 수차례의 전쟁이 있었고,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더 많은 땅을 차지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양측이 총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3가지 핵심 쟁점 때문입니다.

가시 #1: 빼앗긴 땅, 그리고 세워지는 정착촌 (영토 문제)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그리고 동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바로 이 땅에 자신들의 독립 국가를 세우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 계속해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국제법상 불법이지만, 이스라엘은 "안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죠.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내 집 안방에 허락도 없이 다른 사람이 들어와 집을 짓고 있는 셈이니, 갈등이 멈출 수가 없는 겁니다.

가시 #2: 신의 도시를 향한 독점욕 (예루살렘 문제)

예루살렘은 단순히 한 도시가 아닙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더없이 신성한 '성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체를 "나눌 수 없는 영원한 수도"라고 선언했지만, 팔레스타인 역시 동예루살렘을 미래 국가의 수도로 삼고 싶어 합니다. 신의 이름 아래 평화가 깃들어야 할 이 도시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치열한 갈등의 화약고가 되어버렸습니다.

가시 #3: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 (난민 문제)

1948년 '나크바' 때 쫓겨난 75만 명의 난민들. 그 후손들은 현재 수백만 명으로 불어나 주변국 난민촌 등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이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 즉 '귀환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합니다.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돌아오면 유대인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이유 때문이죠. 할아버지가 살던 집 열쇠를 손에 쥔 채,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눈물은 분쟁의 가장 아픈 단면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

전쟁과 협상, 피로 얼룩진 역사 연대표

  • 1917년: 밸푸어 선언 (갈등의 씨앗)
  • 1948년: 이스라엘 독립 & 1차 중동 전쟁 (나크바 발생)
  • 1967년: 6일 전쟁 (이스라엘, 서안-가자-동예루살렘 점령)
  • 1987년: 1차 인티파다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
  • 1993년: 오슬로 협정 (평화에 대한 잠시의 희망)
  • 2000년: 2차 인티파다 (희망이 절망으로)
  • 2006년 이후: 하마스의 가자지구 장악, 반복되는 무력 충돌

이 글의 핵심 요약 (이것만 기억하세요!)

  1. 시작: 100여 년 전, 영국이 한 땅(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밸푸어 선언)하면서 갈등 시작.
  2. 분기점: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며 전쟁 발발. 이스라엘은 '승리', 팔레스타인은 '대재앙(나크바)'을 겪음.
  3. 핵심 쟁점 3가지: ① 점령지 영토와 불법 정착촌 문제, ② 누구의 수도인가를 둔 예루살렘 문제, ③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난민 문제.
  4. 결론: 이 분쟁은 단순히 '누가 옳고 그르다'로 판단할 수 없는, 두 민족의 생존권과 역사, 종교가 복잡하게 얽힌 비극이다.

예루살렘에서 울려 퍼진 한 발의 총성. 그 뒤에는 이처럼 100년 넘게 쌓여온 눈물과 분노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테러를 정당화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왜 이토록 지독한 증오의 사슬을 끊어내야만 하는지를 깨닫게 해줄 뿐입니다.

이 복잡하고 아픈 역사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과연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올 첫걸음은 무엇일까요?

 

 

지난 이야기


이스라엘 여행 가도 될까? 테러 발생


이란-이스라엘, 12일 전쟁 끝. 극적인 휴전 합의

반응형

댓글